Notice
05-08 00:00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관리 메뉴

하나님은 진리, 길, 생명이십니다.

[성경] 구절: 용서와 사랑 본문

전능하신 하나님 교회 책/그리스도의 말씀

[성경] 구절: 용서와 사랑

영나미 2019. 5. 7. 21:52

[성경] 구절: 용서와 사랑




이어서 아래의 두 구절을 보자.


4.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용서하라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번 뿐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할찌니라”(마18:21~22)


5. 주의 사랑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마 22:37~39)


[성경] 구절: 용서와 사랑[성경] 구절: 용서와 사랑



이 두 구절 중 하나는 용서를 얘기하고, 다른 하나는 사랑을 얘기하고 있다. 이 두 가지 내용은 은혜시대에 예수가 사역할 내용을 두드러지게 보여 준다.


하나님은 성육신할 때, 특정 단계의 사역과 함께, 그 시대에 보이고자 하는 성품, 구체적인 사역 항목도 가지고 온다. 그리고 인자는 하나님이 그 시대에 하고자 하는 사역의 범위를 중심으로, 그보다 넘쳐 나거나 부족하게 행하지 않는다. 그의 모든 말씀과 사역은 해당 시대와 관련이 있다. 사람의 방식이나 언어로 표현하든 신적 언어로 표현하든, 어떤 방식과 입장에서 표현하든 그에게는 이루고자 하는 목적이 있다. 바로 그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그의 뜻이 무엇인지, 사람에 대한 요구가 무엇인지를 사람이 알게 하는 것이다. 그는 다양한 방식과 입장을 통해 그의 뜻과 사람을 구원하는 사역을 사람이 알게 할 것이다. 그래서 은혜시대에 예수가 자신이 설명하려는 바를 인간적 언어로 전하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다. 아울러 많은 경우 그는 평범한 길 안내자의 위치에서 사람과 대화하고,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며, 사람이 구하는 것을 도와주었다. 이러한 사역 방식은 은혜시대 전의 율법시대에서는 볼 수 없었다. 그는 사람과 훨씬 친근해지고 사람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으며, 형식과 방식상에서 훨씬 더 실제적인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성경] 구절: 용서와 사랑[성경] 구절: 용서와 사랑[성경] 구절: 용서와 사랑[성경] 구절: 용서와 사랑


사람을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용서하라는 비유가 이 점을 잘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숫자는 사람들에게 예수가 당시에 이렇게 비유한 의도가 무엇인지 알게 한다. 그의 목적은 다른 사람을 용서할 때는 한두 번도 아니고 일곱 번도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용서할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 여기서 ‘일흔번씩 일곱번’은 어떤 개념일까? 바로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일을 자신의 책임, 필수 과제이자 ‘길’로 삼아 지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록 비유에 불과하지만, 이 표현은 가장 요긴하고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비유를 통해 사람들은 예수의 뜻을 깊이 깨닫고, 자신이 실행해야 할 길을 찾았으며, 실행의 원칙과 기준을 얻었다. 그리고 이해와 관용을 베푸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조건 없이, 횟수의 제한 없이 사람을 용서하라는, 용서에 대한 정확한 개념과 확실한 이해를 얻었다. 예수는 어떤 생각을 하며 이런 말씀을 했겠느냐? 그가 정말로 일흔번씩 일곱번이란 숫자를 생각했겠느냐? 아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용서하는 데에 횟수가 정해져 있느냐? 많은 사람이 여기서 말하는 ‘횟수’에 흥미를 느끼며, 이 횟수의 기원과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알고 싶어 한다. 왜 예수의 입에서 이러한 숫자가 나왔는지 궁금해하며, 이 숫자에 분명 더 깊은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이 숫자는 하나님이 인성으로 말씀한 비유에 불과하다. 설사 어떤 숨은 의미나 함의가 있다 할지라도 결국에는 사람에 대한 예수의 요구와 관련된다. 하나님이 성육신하기 전에 사람은 하나님이 한 말씀들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의 말씀은 완전한 신성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말씀의 관점과 말씀이 나온 배경을 사람은 볼 수 없고 닿을 수도 없었다. 또한 사람이 볼 수 없는 영계에서 선포된 것이라 육에서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꿰뚫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성육신한 후에는 영계에서 벗어나 인간적인 관점에서 사람과 대화하게 되었다. 사람의 관념적인 상상이나 삶 속에서 보고 접하는 일들,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는 방식과 이해할 수 있는 언어, 그리고 인류가 이미 알고 있는 지식을 이용해 그의 신적 성품과 마음, 사물을 대하는 그의 태도를 전하게 되었다. 이를 통해, 사람들이 이해 가능하고 충분히 깨달을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뜻과 요구 기준을 이해하고 깨닫게 하였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인성으로 사역하는 방식과 원칙이다. 육신을 입은 하나님의 사역 방식과 원칙이 대부분의 경우 인성을 통해 이루어지긴 했지만, 오히려 신성으로 사역해서는 얻기 힘든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인성을 통한 하나님의 사역은 그 내용이 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며 실용적이다. 방식도 유연하고, 형식상으로도 율법시대를 초월하게 되었다.







[성경] 구절: 용서와 사랑[성경] 구절: 용서와 사랑

이어서 주를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이 말씀은 직접 신성으로 선포한 것이냐? 그렇지 않다! 인자가 인성으로 한 말씀이다. 사람만이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고, 다른 사람을 자신의 생명을 보살피듯 보살핀다는 말을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이런 식으로 말씀한 적이 없으며, 하나님 신성에는 이러한 언어가 없다. 하나님은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을 신조로 삼아 인류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규범화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 속성의 자연스러운 발현이다. 너희는 하나님이 “나는 인류를 내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 같이 사랑한다”라고 말씀하는 것을 들어 본 적이 있느냐? 사랑은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 안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을 특정 방식으로 대하는 것은 그의 성품이 자연스럽게 발현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기 위해 일부러 무엇을 하거나 특정 방식과 도덕규범을 따르려 노력할 필요가 없다. 그는 원래부터 이런 본질을 갖추고 있다. 여기에서 너희는 무엇을 볼 수 있느냐? 하나님은 인성으로 사역할 때, 인간적인 형식으로 많은 말씀과 진리, 방식을 전하였다. 따라서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 뜻도 함께 전하여 사람이 이해하고 알 수 있게 해 주었다. 이를 통해, 사람은 하나님 자신의 고유한 신분과 지위를 대표하는 본질과 속성을 완전히 이해하고 알게 되었다. 




[성경] 구절: 용서와 사랑[성경] 구절: 용서와 사랑

다시 말해, 성육신한 인자는 최대한 많이 가장 정확하게 하나님 자신의 고유한 성품과 본질을 나타냈다. 인자의 인성은 결코 사람이 하늘의 하나님과 교류하고 소통하는 데에 있어 방해물과 장애가 아니라 오히려 인류와 창조주를 연결할 수 있는 유일한 경로이자 다리이다. 이쯤에서 너희는 은혜시대에 예수가 행한 사역의 성격과 방식 중 일부는 지금의 사역과 아주 많이 유사하다고 느껴지지 않느냐? 지금 단계의 사역에서도 많은 인간적인 언어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했다. 또한 사람이 일상생활에서 자주 말하는 것이나 인류의 지식 차원의 언어와 방식을 많이 이용해서 하나님 자신의 뜻을 표현했다. 하나님이 일단 성육신하고 나서는 인간적인 입장에서 말씀하든 신적인 입장에서 말씀하든, 많은 말이나 표현 방식은 모두 사람의 말이나 방식을 매개체로 사용한다. 즉, 하나님이 성육신했을 때는 바로 너희가 하나님의 전능과 지혜를 보고, 하나님의 실제적인 면면을 인식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라는 것이다. 성육신 하나님은 성장 과정에서 인성을 통해 사람의 지식, 상식, 언어 혹은 표현법을 이해하고 배우고 파악하게 된다. 피조물인 인류에게서 비롯된 이러한 것들이 성육신 하나님께 갖춰져, 그가 하나님의 성품 혹은 신성을 전하는 도구가 된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사람의 입장에서 사람의 언어로 더 적절하고 실제적이며 정확하게 사역할 수 있게 됨으로써, 사람이 더 쉽게 접근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를 통해 그는 자신이 원하는 사역의 성과를 거두게 된다. 하나님이 육신으로 이렇게 사역하는 것이 더 실제적이지 않으냐? 이는 하나님의 지혜가 아니냐? 하나님이 성육신하고, 그 육신이 사역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게 되었을 때가 바로 하나님의 성품과 사역이 장차 실제적으로 발현될 때이다. 그리고 인자가 정식으로 직분을 이행하기 시작하는 때이기도 하다. 이는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더 이상 ‘세대 차이’가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하며, 사자를 통해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하던 사역을 곧 그만두고, 하나님 자신이 친히 육신을 통해 그가 하고자 하는 모든 말씀과 사역을 할 것임을 의미한다. 아울러 하나님이 구원하려는 인류가 하나님과 더 가까워졌음을 의미한다. 또한 하나님의 경영 사역이 새로운 영역에 들어섰고, 곧 완전히 새로운 시대가 전 인류를 향할 것임을 의미한다.


[성경] 구절: 용서와 사랑[성경] 구절: 용서와 사랑



성경을 읽어 본 사람은 예수가 강생했을 때 일어난 많은 사건들에 대해 알고 있다. 그중 가장 큰 사건이 바로 마왕에게 쫓긴 것으로, 온 성안의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이 모두 살해당하기까지 한 것이다. 이를 보면 하나님이 성육신해서 사람들 가운데 왔을 때 엄청난 위험을 감수해야 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이 인류 구원의 경영을 완성하기 위해 얼마나 큰 대가를 치렀는지, 성육신하여 행하는 사역에 얼마나 큰 기대를 걸었는지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육신이 사람들 가운데서 사역을 충분히 감당할 정도가 되었을 때, 하나님의 심정은 어떠했겠느냐? 조금은 이해할 수 있지 않으냐? 새 사역을 사람들 가운데 전개할 수 있게 되었으니 적어도 기쁜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예수가 세례를 받고 정식으로 사역을 시작하며 직분 이행에 들어갔을 때, 하나님의 마음은 더없이 즐거웠다. 오랫동안 기다리고 준비한 끝에 드디어 정상인의 육신을 취하여 사람들이 볼 수도 만질 수도 있는, 피와 살이 있는 사람의 형상으로 그의 새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마침내 사람의 신분으로 사람들과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하며 마음을 나눌 수 있게 되었다. 마침내 사람의 언어와 방식으로 사람들과 대면할 수 있게 되었으며, 사람의 언어를 이용해 사람들에게 공급하고 사람들을 인도하며 도와줄 수 있게 되었다. 사람들과 같은 식탁에서 식사하고 같은 공간에서 생활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사람의 방식으로, 나아가 사람의 시각으로 인류와 사물을 대하고 모든 것을 대할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이 보기에 이 모든 것들은 이미 육신을 입은 사역의 첫 전투에서 승리한 것이며, 대성공을 거두었다고 할 수 있었다. 물론 이는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는 일이었다. 그때부터 하나님은 처음으로 사람들 가운데 사역함에 위안을 느꼈다. 이 모든 것이 너무나 실제적이고 자연스럽게 일어나서, 하나님은 실로 참된 위안을 느꼈다. 하나님이 새로운 단계의 사역을 성취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이 기쁨과 위안을 느낄 때, 그때가 바로 인류가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질 수 있을 때이자 구원이 가까워졌을 때이다. 또 그때가 하나님께는 그의 새 사역이 전개되고, 그의 경륜이 앞으로 나아가는 때이며, 그의 뜻이 완전한 성취에 가까워질 수 있는 때이다. 이런 기회가 왔다는 것은 인류에게는 행운이고 더없이 좋은 일이었다. 구원을 기다리는 모든 사람에게 이루 말할 수 없이 엄청난 희소식이었다. 


[성경] 구절: 용서와 사랑[성경] 구절: 용서와 사랑[성경] 구절: 용서와 사랑[성경] 구절: 용서와 사랑


하나님이 새로운 단계의 사역을 펼칠 때는 하나님께 새로운 시작이 열린 것이다. 이 새로운 사역과 시작이 사람들 사이에서 전개되고 실현될 때는 이 사역의 결과가 나타나고 이루어진 때이며, 하나님이 최종 효과와 성과를 본 때이다. 또한 하나님이 그 성과에 만족하며 즐거워하는 때이다. 하나님은 이미 그가 찾고자 하는 사람을 보았고 확정하고 얻었으며, 그의 사역이 성취될 수 있게 하고 그를 만족게 할 수 있는 자들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마음의 위안을 얻어 슬픔에서 벗어나 즐거웠다. 즉, 자신의 육신이 사람들 가운데서 펼치고자 하는 새 사역이 막힘없이 이루어지기 시작했을 때, 이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고 느꼈을 때, 하나님은 이미 결말을 보았고, 이 결말로 인해 만족스럽고 즐거웠다. 하나님이 그 즐거움을 어떻게 나타낼까? 상상이 되느냐? 하나님이 눈물을 흘려도 될까? 하나님이 눈물 흘릴 수 있을까? 하나님이 손뼉을 쳐도 될까? 하나님이 춤을 출 수 있을까? 하나님이 노래를 불러도 될까? 이 노래는 마땅히 어떤 노래여야 할까? 하나님은 당연히 마음속 즐거움과 기쁨을 표현하는 아름답고 감동적인 노래를 부를 수 있으며, 그 노래를 사람들과 자기 자신, 나아가 만물에게 들려줄 수 있다. 하나님은 어떤 방식으로든 즐거움을 표현할 수 있고, 이는 아주 정상적인 일이다. 하나님은 희로애락이 있기 때문에 자신의 다양한 심정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권리이며,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니,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어떤 고정된 생각을 가지거나 자신의 견해 속에 하나님을 가둬서도 안 된다. 하나님께 이것도 저것도 하지 말고, 이렇게 저렇게 해서도 안 된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즐거움과 감정을 제한해서는 안 된다. 사람이 보기에 하나님은 즐거워해서도, 울거나 눈물을 흘려서도 안 되며, 그 어떤 감정도 표현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최근 두 차례의 교제를 통해, 너희는 더 이상 하나님을 이렇게 대하지 않을 것이고, 하나님께 어느 정도 자유와 해방을 허락할 것이라 믿는다. 이것은 아주 바람직한 현상이다. 나중에 너희가 하나님이 슬퍼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진정 그 슬픔을 느낄 수 있고, 하나님이 기뻐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진정 그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정도가 되면, 최소한 하나님이 왜 즐거워하고 왜 슬퍼하는지를 확실하게 알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네가 하나님의 슬픔으로 인해 슬퍼하고, 하나님의 기쁨으로 인해 기뻐할 수 있을 때, 너의 마음은 하나님께 완전히 얻어질 것이며, 너와 하나님과의 사이에는 그 어떤 장벽도 없을 것이다. 또한, 너는 사람의 상상과 관념 혹은 지식으로 하나님을 속박하지 않을 것이다. 그때 하나님은 너의 마음에 생생하게 살아 있는 존재가 되며, 너의 생명이 된 하나님이자 너의 모든 것을 주재하는 주인이 되는 것이다. 너희는 이러한 바람이 있느냐? 이렇게 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있느냐?

Comments